넘치는 축제, 기억되지 않는 도시 [ 고성호의 관광 개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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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호 (사)한국관광레저학회 부회장 관광학 박사
코오롱글로벌(주) 레저사업본부 기획 담당 / cityko@gmail.com

공간(Space)에 특정 공동체의 기억과 문화적 내러티브가 더해질 때, 강력한 ‘장소성(Placeness)’이 형성된다. 장소성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머물고,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의미 있는 곳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축제는 바로 이러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문화적 장치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사람들이 의례를 위해 함께 모일 때 일상과는 다른 공동의 고양감이 생기고, 그 속에서 공동체적 의미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축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축제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의 장소에 모여 감정을 공유하고, 그 경험을 통해 지역과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다.
지금 한국에는 수많은 축제가 열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대중 참여성이 낮은 행사를 제외하고 2일 이상 개최되는 전국 지역축제는 2025년 1,214개로, 2019년 887개 대비 약 37% 증가했다. 2026년에는 1,266개 안팎의 축제가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것으로 파악된다. 숫자와 규모만 보면 대한민국 축제는 분명 양적 팽창을 이루었다.
하지만 상당수 축제는 외지인은 물론 지역주민에게도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끝난다. 지자체의 과도한 성과주의와 맞물린 관람객 수 부풀리기 논란, 비효율적인 예산 집행, 획일화된 프로그램은 여전히 반복된다. 어느 지역을 가도 비슷한 무대, 먹거리 장터, 체험 부스가 등장한다. 여기에 축제 운영기관 선정 과정의 불투명성에 대한 문제 제기도 끊이지 않는다. 축제가 지역의 삶에서 출발하기보다 예산 집행과 실적 보고를 위해 만들어지는 순간, 축제는 행정 이벤트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기억되는 축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해외의 이른바 ‘강한 축제’들은 반드시 대규모 예산이나 정부 주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마을의 독특한 이야기, 주민들의 자발적이고 반복적인 참여, 그리고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 축제를 지역의 강력한 문화 콘텐츠로 만든다. 스페인 이비(Ibi)의 ‘엘스 엔파리나츠(Els Enfarinats)’는 주민들이 하루 동안 가짜 군복을 입고 도시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행동하며, 밀가루와 달걀, 폭죽을 던지는 난장판을 벌이는 축제다. 단순한 장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권위와 질서를 잠시 뒤집고 공동체가 웃음으로 긴장을 풀어내는 카니발적 의례가 담겨 있다.
영국 글로스터셔의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쿠퍼스 힐 치즈 롤링(Cooper’s Hill Cheese Rolling)’ 역시 마찬가지다. 거대한 무대도, 복잡한 프로그램도 없다. 사람들은 언덕 아래로 굴러가는 치즈를 쫓아 몸을 던질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단순하고 위험하며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이 축제를 지역을 대표하는 강력한 문화적 이미지로 만들었다. 축제의 흡입력은 예산의 규모가 아니라, 오래도록 각인되는 하나의 장면에서 나온다.
한국에도 이미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 서울 성북동에서 개최되는 성북세계음식축제 ‘누리마실’은 600m 남짓한 거리 위에서 수십 개국 대사관과 지역 주민, 외지인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장을 만들어냈다. 규모는 작지만, 동네의 일상과 세계의 문화가 한 거리 위에서 만나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최근 스포츠 관광의 대안적 모델을 보여준 ‘코오롱 트레일런’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엄격한 의미의 지역축제라기보다는 스포츠 이벤트에 가깝지만, 자연·체류·커뮤니티·브랜드 경험이 결합될 때 기업 행사도 지역의 장소 마케팅과 만나 하나의 스포츠 관광형 축제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축제는 많아졌다. 하지만 기억되는 축제는 여전히 드물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정체성이다. 그 지역이어야 할 이유가 없는 무대, 주민이 빠진 프로그램, 어디서나 복제 가능한 먹거리로는 그 도시를 기억하게 만들 수 없다. 축제는 예산을 쓰고 사라지는 행사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적·사회적 자본과 기억을 쌓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한국 축제의 미래는 ‘더 큰 규모’가 아니라, 그 장소가 아니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더 선명한 장소성(Placeness)’에 있다.
출처 : 여행신문(https://www.traveltimes.co.kr/news/articleLi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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