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현의 트렌드 리포트] 열여덟, 가장 긴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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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 객원교수
leesanghyun@yonsei.ac.kr

시간이 빠르다는 말을 우리는 쉽게 한다. 그러나 그 속도를 진짜로 체감한 것은 딸이 열여덟이 된 요즘이다. 엊그제 태어난 것 같던 유나는 어느새 나와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사회·정치·경제 이야기를 나누고, AI의 미래를 고민하는 어른이 되었다.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는 유나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어느 학교에 가느냐고, 무엇을 전공하느냐고,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이냐고. 기대와 애정이 담긴 질문이지만, 동시에 빠른 결정을 요구하는 시대의 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직접 유나에게 묻고, 어떤 이들은 나를 통해 묻는다. 그런 와중에 유나가 내게 되물었다. “아빠는 내 나이 때 어땠어?”
나는 그 질문이 반가웠다. 그리고 동시에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너는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니?” 내가 열여덟이었을 때 가장 많이 들었고, 가장 답하기 어려웠던 질문이다. 하나로만 답하기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찾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인데, 답을 미리 제출하라는 요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식당에 들어가 메뉴도 보지 않고 주문부터 하라는 말처럼.
우리는 흔히 ‘무엇이 될 것인가’를 직업으로 번역한다. 기자, 의사, 변호사, 교수, CEO. 이해하기 쉬운 명사형 답이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삶은 명사보다 동사에 가깝다. ‘무엇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 유나는 ‘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자처럼 질문하고 조사하고 쓰는 법을 배우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명사 하나로 설명하기엔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전공도 직업도 정체성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특정 시점의 선택이며 하나의 행동이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구글이 없었고, 대학 시절에는 에어비앤비가 없었다. 대학원을 다닐 때는 OpenAI라는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당연해 보이는 산업과 직업 대부분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등장했다. 유나의 시대에는 우리가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역할이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면 열여덟에 모든 답을 확정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래서 나는 말했다. 괜찮다고. 지금 무엇을 전공할지 확신이 없어도 괜찮다고. 오히려 그 불확실함이 가능성이라고. 좋은 성적을 위한 수업보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분야를 탐색하는 수업을 들어 보라고 했다. 대학은 미래를 확정하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의 가설을 세우고 수정하는 공간이라고. 무엇을 잘하는지보다, 무엇에 호기심이 생기는지를 지켜보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을 많이 하라고 했다. 여행은 목적지보다 과정이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여행도 좋지만, 도서관에서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펼치는 것도 여행이다. 강의실에서 생소한 주제를 듣는 것도 여행이다. 낯선 환경 속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가.
개인의 선택을 둘러싼 이 분위기는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 대학 진학과 전공 선택은 점점 더 빠른 결정과 확실한 계획을 요구한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표준이 된 시대에 더 중요한 역량은 확신이 아니라 유연성이다. 하나의 답을 빨리 고르는 능력보다, 필요할 때 방향을 수정하는 능력이 더 큰 경쟁력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시대의 또 하나의 트렌드일지도 모른다. 여행 산업이 ‘어디로 갈 것인가’보다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를 묻기 시작한 것처럼, 커리어 역시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 ‘어떤 방식으로 성장할 것인가’를 묻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인생은 여행과 닮았다. 목적지는 바뀔 수 있고, 때로는 돌아가기도 하며, 예상치 못한 풍경이 계획을 수정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지도보다,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용기다. 유나의 대학 선택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깨닫는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하는 태도’라는 것을. 결국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대학은 어디에 도착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는 가장 긴 여행의 출발점이다.
출처 : 여행신문(https://www.traveltimes.co.kr/news/articleLi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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