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현의 트렌드 리포트] 우리는 왜 조용한 공간에 끌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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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때문에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찾을 때마다 늘 비슷했다. 회의실과 호텔, 자동차와 레스토랑 사이를 오가는 일정. 누군가를 만나고, 설명을 듣고, 설득하고, 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도시. 워싱턴은 내게 늘 ‘생각보다 말이 많은 도시’였다. 조용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무언가가 논의되고 결정되는 곳. 그래서 출장 중에는 이상하게도 도시를 제대로 본 기억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출장에서는 조금 다른 마음이 들었다. 며칠째 이어진 미팅을 마친 뒤, 반나절 정도는 일부러 아무 약속도 잡지 않았다. 그리고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스미스소니언 대신, 워싱턴 북서쪽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한 크리거 미술관(Kreeger Museum)으로 향했다. 택시는 나무가 우거진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곳이 정말 미술관이 맞나 싶은 건물이 나타났다. 웅장한 박물관도, 긴 줄도 없었다. 잘 지어진 어느 미국 부자의 집 같은 분위기였다. 실제로도 그곳은 한때 데이빗(David)과 카르멘 크리거(Carmen Kreeger) 부부가 살던 집이었다.
크리거 미술관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곳은 단순히 작품을 모아 놓은 공간이 아니라, 예술과 함께 살아간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에 가깝다. 미술관은 20세기 미국 현대 건축의 거장 필립 존슨이 설계했다. 미술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왜 사람들이 이 공간을 사랑하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햇빛은 과하지 않게 작품 위로 떨어졌고, 창밖의 나무들은 그림의 일부처럼 보였다. 큰 미술관에서 흔히 느끼는 긴장감이나 피로감이 없었다. 크리거 부부는 평생 약 300점이 넘는 예술 작품을 수집했다고 한다. 피카소, 모네, 미로, 샤갈 같은 거장들의 작품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내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특정 그림 한 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간 전체의 공기였다. 집 안을 천천히 걷다 보면 어디선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올 것 같은 느낌이랄까. 실제로 크리거 부부는 음악 애호가였고, 집에서 실내악 공연도 자주 열었다고 한다.
관람객들은 낮은 목소리로 걸었고,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작품 설명을 읽기보다 그냥 오래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한동안 창밖의 나무 그림자가 벽 위로 흔들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출장 중인데도 아주 오랜만에 마음속 소음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점점 이런 공간에 끌리게 되는 걸까.
요즘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경험한다. 더 많은 나라를 가고, 더 좋은 호텔에 머물고, 더 유명한 식당을 예약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로감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여행에서도 ‘충분히 쉬었다’기보다 ‘계속 무언가를 소비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실제로 최근 여행과 라이프스타일 업계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거대한 럭셔리보다 작은 부티크 호텔이 주목받고, 관광 명소보다 동네 서점과 로컬 카페를 찾아가는 여행이 늘어난다.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큰 로고나 화려함에서 만족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조용하지만 깊은 경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오래 남는 감각을 원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제 ‘더 큰 경험’보다 ‘더 깊은 경험’을 찾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크리거 미술관은 바로 그런 시대의 감각과 닿아 있었다. 그곳에는 SNS용 포토존도 많지 않았고, 사람들을 압도하는 스케일도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공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좋은 공간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곳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천천히 돌아가게 만드는 곳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도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한때 사람들은 더 크고 더 화려한 것을 성공이라고 믿었다. 더 큰 집, 더 바쁜 일정, 더 많은 약속, 더 많은 경험.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문 끝에서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한 것들을 다시 발견한다. 조용한 대화, 오래 바라본 풍경, 천천히 마시는 커피, 사람 냄새 나는 공간 같은 것들. 워싱턴 출장 마지막 날, 나는 크리거 미술관에서 한참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어쩌면 좋은 여행이란 새로운 장소를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잊고 지냈던 자기 감각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지금 더 많은 장소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마음이 조용해지는 단 하나의 공간을 찾고 있는 것일까.
출처 : 여행신문(https://www.traveltimes.co.kr/news/articleLi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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