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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버려진 공간의 재발견, 충북 레이크파크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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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개 계단 대신 330m 모노레일… ‘무장애 관광’ 실현한 청남대
1937년 도청과 군사 벙커의 변신, 원도심 활력 불어넣는 문화 재생
폐교의 지속 가능한 재생… 농촌의 새로운 거점이 된 괴산

충북 청주·괴산 글·사진=김주현 인턴기자 jhkim@traveltimes.co.kr

2003년 개방 이후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된 청남대 / 김주현 인턴기자

화려하게 새로 지어 올린 마천루는 없다. 대신 쓸모를 다해 버려지거나 굳게 닫혀 있던 공간들이 다정하게 다시 피어나는 풍경이 있다. 내륙의 호수와 산림 자원을 활용해 지역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충북 레이크파크 르네상스’의 핵심은 바로 친환경과 업사이클링이다. 낡은 콘크리트를 부수는 대신 시대의 기억을 보존하고, 그 안에 생태의 숨결을 꼼꼼하게 채워 넣은 충북의 의미 있는 공간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권력의 장막을 거둔 생태 정원

대청호의 잔잔한 물결을 굽어보는 청남대는 한때 허락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의 요새였다. 1983년부터 다섯 명의 대통령이 머물렀던 이 견고한 공간은 이제 무거운 철문을 활짝 열고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오전 10시에 멈춰있는 청남대 본관 시계 / 김주현 인턴기자
오전 10시에 멈춰있는 청남대 본관 시계 / 김주현 인턴기자

본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2003년 4월18일 오전 10시에 멈춰 있는 시계다. 대통령의 전용 별장이 온전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순간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청남대 제1전망대로 향하는 모노레일 / 김주현 인턴기자
청남대 모노레일에서 바라보는 대청호 풍경 / 김주현 인턴기자

가장 반가운 변화는 굳게 닫혀 있던 풍경의 문턱을 완전히 낮췄다는 점이다. 645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만 닿을 수 있던 제1전망대는 오랜 시간 노약자와 장애인 등 교통약자에게 허락되기 어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옛 정비창고 터에서 산 정상까지 330m 구간을 잇는 친환경 모노레일이 개통되며 상황은 달라졌다.

청남대 제1전망대 풍경 / 김주현 인턴기자

가파른 산비탈의 울창한 수림을 훼손하지 않고 숲의 품 안으로 유연하게 스며든 객차는 단 7분 만에 산등성이를 미끄러져 오른다. 까마득한 계단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이들에게도 마침내 대청호의 압도적인 비경이 평등하게 열린 것이다.

청남대 양어장 옆으로 길게 이어진 메타세쿼이아 숲길 / 김주현 인턴기자

자연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은 경내 곳곳에서 발견된다. 과거 대통령 전용 양어장이었던 곳 옆에 100여 그루의 메타세쿼이아는 수질을 정화하는 훌륭한 생태 일꾼 역할을 해내며 숲을 찾는 이들에게 청량한 그늘을 내어준다.

행정 요새, 책으로 허물다

청주 원도심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낡은 건축물을 훌륭하게 업사이클링한 사례를 마주하게 된다. 1937년에 지어진 옛 충북도청 본관은 행정 요새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복합문화공간 ‘그림책정원 1937’로 다시 태어났다.

옛 충북도청 본관이 복합문화공간 ‘그림책정원 1937’로 탈바꿈했다 / 김주현 인턴기자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층마다 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된 ‘읽기-보기-만들기’의 입체적인 동선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방문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계적으로 그림책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짜인 구조다.

그림책정원 1층 서가 / 김주현 인턴기자

그 시작점인 1층은 그림책과 가장 다정하게 만나는 ‘열린 독서 공간’이다. 열린서가와 첫서가, 정원서가, 그리고 커뮤니티룸으로 채워진 이 공간은 아이부터 성인까지 누구나 자유롭게 머물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었다. 책만 읽고 떠나는 딱딱한 서재가 아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다정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쉼터에 가깝다.

도슨트가 정승각 작가의 원화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 김주현 인턴기자
도슨트가 정승각 작가의 원화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 김주현 인턴기자

2층으로 올라가면 그림책을 현대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전시 공간이 펼쳐진다. 현재 이곳에서는 한국 그림책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정승각 작가의 데뷔 35주년 특별 원화전 ‘그림책에 담긴 삶’이 진행 중이다. ‘까막나라에서 온 삽살리’, ‘오소리네 집 꽃밭’, ‘금강산 호랑이’, ‘춘희는 아기란다’ 등 작가의 대표작 원화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어 3층으로 향하면 직접 팝업북을 펼쳐보는 체험 공간과 함께 옛 도청 건물의 역사를 잊지 않도록 꼼꼼하게 기록해 둔 아카이브를 마주하게 된다. 부수고 새로 짓는 대신, 역사적 골격은 그대로 둔 채 공간의 용도만 유연하게 전환해 세대를 아우르는 소통의 장을 만들어낸 기획이 돋보인다.

날것의 예술을 품은 비밀 벙커

충북 청주시 도청 옆에는 오랜 시간 지도에 존재하지 않던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1973년, 유사시 도청 공무원들의 대피를 목적으로 산 중턱의 거친 암반을 뚫어 조성한 군사용 벙커다. 동네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냉장고를 대신해 쓰이던 서늘한 굴로도 남아 있는 이 요새가, 2024년 10월 시민들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빗장을 풀었다. 바로 ‘당산 생각의 벙커’다.

군사 시설에서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재생된 ‘당산 생각의 벙커’ / 김주현 인턴기자
군사 시설에서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재생된 ‘당산 생각의 벙커’ / 김주현 인턴기자

전국 곳곳에 방치된 벙커들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매끄러운 전시장으로 탈바꿈하는 것과 달리, 이곳은 최소한의 설비만을 갖춘 채 날것의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총길이 200m 중 내부만 140m에 달하며, 크고 작은 14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육중한 납문과 다듬어지지 않은 암반의 질감이 뿜어내는 강렬한 분위기는 오히려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훌륭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벙커 전시 ‘천 개의 감정 만 개의 표정’에 참여한 작품 중 하나 / 김주현 인턴기자
벙커 전시 ‘천 개의 감정 만 개의 표정’에 참여한 작품 중 하나 / 김주현 인턴기자

현재 벙커 내부에서는 현대미술과 인간의 희로애락을 접목한 전시 ‘천 개의 감정 만 개의 표정’이 한창이다. 이 전시는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억누르고 은폐해 온 감정과 아픔을 조명하고, 이를 온전히 마주함으로써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자는 치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내륙의 바다 충북

충북엔 바다가 없지만, 강과 호수가 빚어낸 내륙의 수생태계는 바다 못지않게 역동적이다. 고령화가 진행 중인 조용한 농촌 마을 괴산은 최근 하천과 숲 같은 자연 자원을 영리하게 엮어 여행자들에게 생동감 넘치는 쉼표를 건네고 있다.

충북수산파크 아쿠아리움에서 도슨트의 해설과 함께 생태 관람이 진행되고 있다 / 김주현 인턴기자
충북수산파크 아쿠아리움에서 도슨트의 해설과 함께 생태 관람이 진행되고 있다 / 김주현 인턴기자

충북수산파크 아쿠아리움에 들어서면 괴강을 누비던 쏘가리부터 거대한 피라루쿠, 철갑상어까지 평소 보기 힘든 담수어들이 270도 수중 터널을 가로지른다. 이 촉촉한 기운은 옆 건물인 정서곤충체험관으로 매끄럽게 이어진다. 기존 사무연구동을 개조한 이곳에서는 나비 표본을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굼벵이나 밀웜 같은 곤충을 직접 만져보며 생태를 가깝게 체감하는 특별한 체험도 가능하다.

로드킬 문제를 다룬 특별전 / 김주현 인턴기자
로드킬 문제를 다룬 특별전 / 김주현 인턴기자

특히 흥미로운 것은 로드킬 문제를 다룬 특별전이다. 인간의 도로가 야생동물의 길을 끊어낸 시린 현실을 짚어내며,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인근 생태뮤지엄의 특별체험전 ‘괴산 우주특별시 별별탐사대’에서는 아이들이 설치미술 공간을 지나 은하수를 유영하듯 공간을 감각하며 스스로 창작물을 완성해 내는 탐험을 즐긴다.

폐교에 불어넣은 다정한 쓸모

가장 짙은 여운이 남는 곳은 아이들이 떠나며 생기를 잃었던 텅 빈 폐교들이다. 충북은 이 버려진 공간에 다시 초록빛 온기를 채워 넣었다. 미원중 운암분교는 연간 1,100명의 도민이 흙을 만지고 반려식물을 가꾸는 치유의 장, ‘정원교육센터’로 완벽하게 피어났다.

주민들을 위한 정원교육센터로 재탄생한 미원중 운암분교 / 김주현 인턴기자
주민들을 위한 정원교육센터로 재탄생한 미원중 운암분교 / 김주현 인턴기자

청천면의 옛 대후폐교 역시 잔디광장과 캠핑장을 품은 체류형 농촌체험시설 ‘농소막’으로 멋지게 부활했다. 농소막은 단순히 하룻밤 잠만 자고 떠나는 단절된 숙소가 아니다. 마을 행사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여행자는 거부감 없이 로컬의 다정한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폐교를 리모델링해 체류형 농촌체험시설로 바뀐 ‘농소막’ 풍경 / 김주현 인턴기자
폐교를 리모델링해 체류형 농촌체험시설로 바뀐 ‘농소막’ 풍경 / 김주현 인턴기자

특히 이곳은 도시 청년들이 일정 기간 머무르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괴산살이 프로그램인 ‘괴산어때’의 든든한 거점이 되어주고 있다. 고즈넉한 잔디광장을 바라보노라면, 청년들이 왜 도시를 떠나 이곳에 머물며 로컬에서의 내일을 꿈꾸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또한 농소막은 낮은 가격을 무기 삼아 지역의 숙박 수요를 독점하기보다, 단체 수요 발생 시 주변 펜션들과 유기적으로 동선을 연계하는 등 지역 사회와 상생하는 따뜻한 롤모델까지 보여주고 있다.

과거를 허무는 대신 새로운 가치를 입히는 업사이클링 모델은 지역 경제와 동반 성장하는 지속 가능한 관광의 표준을 제시한다. 충북의 유휴 공간들은 지역의 미래 가치를 만드는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출처 : 여행신문(https://www.traveltimes.co.kr/news/articleLi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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