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행은 AI 시대 최고의 학습 환경이 되었을까? [이상현의 트렌드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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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학생들의 학습 방식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생성형 AI가 일상화된 이후 과제의 완성도는 높아졌고, 자료 정리도 훨씬 정교해졌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더 분명해진 변화가 하나 있다. 질문이 줄었다는 점이다. 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같은 슬라이드를 보면서도 각자 다른 질문을 던졌어요. 그런데 요즘은 비슷한 답을 들고 옵니다.”
생성형 AI가 본격적으로 일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질문이 강의실 안에서 태어났다. 왜 이런 가정을 쓰는지, 이 논리가 다른 맥락에서도 통하는지, 예외는 없는지 같은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지금은 많은 질문이 강의실에 오기 전에 이미 정리된다. 학생들은 알고리즘에게 먼저 묻고, 매끈하게 정돈된 답을 받아온다. 효율은 분명 높아졌다. 하지만 망설임과 의문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어딘가 묘한 정적이 남는다.
문제는 세상이 단순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는 데 있다. 기술과 정치, 경제와 문화가 동시에 얽히면서 선택은 더 어려워졌다. AI는 계산을 도와주지만 판단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판단은 정답을 많이 아는 능력과는 다른 차원의 감각이다. 최근 대학 교육이 ‘횡단 능력’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무를 잘 안다고 곧바로 좋은 의사결정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전략은 윤리와 사회를 함께 고려해야 하고, 데이터는 맥락을 통과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힘은 강의실이나 화면 속 정보만으로는 쉽게 길러지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여행을 하나의 학습 환경으로 다시 보게 된다. 여행은 지식을 더해주는 시간이기보다, 판단이 필요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경험에 가깝다.
몇 달 전, 싱가포르 공항에서 대한항공 비행기 결항을 겪은 적이 있다. 중요한 출장이 걸린 일정이었다. 이미 필요한 정보는 거의 다 확인해둔 상태였고, 몇 시간의 지연 끝에 결국 운항 취소 안내가 나왔다. 그 순간 머릿속이 잠시 하얘졌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다음 장면이었다. 같은 비행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안내를 들었지만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누군가는 곧바로 항공사 직원에게 다가가 항의했고,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보상 규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섣불리 움직이기보다 주변의 흐름부터 살폈다. 어느 카운터에 줄이 길어지는지, 어떤 승객들이 먼저 방향을 바꾸는지, 공항 전체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읽고 있었다. 그때 가장 빨리 길을 찾은 사람은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황을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계속 변하는 흐름으로 읽어낸 사람이었다. 나 역시 그 순간 규정을 끝까지 따지는 대신, 가장 빨리 출발할 수 있는 다른 항공편을 찾고 먼저 결제했다. 기존 항공권은 전액 환불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이미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더 많이 아는 일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언제 행동으로 옮길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 나는 전광판에 적힌 정보보다 시간의 흐름을 먼저 보고 있었고, 규정보다 상황의 속도를 더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문득 깨달았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시간이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사이에서 무엇을 먼저 보고 무엇을 잠시 내려놓을지를 연습하는 시간에 가깝다는 사실을. 여행은 정답이 사라진 순간, 설명서가 없는 상황, 서로 다른 기준이 동시에 작동하는 장면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계산이 아니라 판단을 연습한다. 이 영역은 강의실도, 알고리즘도 완전히 대신해줄 수 없다. AI는 문제를 풀고 협상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침묵이 의미를 갖는 공기, 문화적 긴장이 미세하게 흐르는 장면까지는 충분히 대신하기 어렵다.
여행은 익숙한 기준이 작동하지 않는 자리에서, 스스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게 한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휴식이 아니라 하나의 학습 방식으로 본다.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유지하기 위한 교양에 더 가깝다. 이제 사람들은 많이 보는 여행보다 깊이 이해하는 여행을 원한다. 무엇을 보았는지보다, 그 장소에서 어떤 판단을 하게 되었는지가 더 오래 남는다.
AI 시대의 여행 트렌드는 더 멀리 가는 데 있지 않다. 더 깊이 횡단하는 데 있다. 장소와 장소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과 맥락 사이를 건너가는 경험. 익숙함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자기만의 기준을 다시 세운다. AI가 점점 더 많은 답을 말해주는 시대다. 그럴수록 여행은 우리에게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질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아직 인간으로 남아 있다는 가장 조용한 증거인지도 모른다.
출처 : 여행신문(https://www.traveltimes.co.kr/news/articleLi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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